박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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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 박소란POEM 2020. 3. 28. 09:34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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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 박소란POEM 2020. 3. 22. 20:26
커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어쩌면 테이블 아래 새하얀 설탕을 입에 문 개미들이 총총총 기쁨에 찬 얼굴로 지나갑니다 개미는 다정한 친구입니까 애인입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달콤한 입술로 내가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당신을 위해 오늘도 나는 단것을 주문하고 마치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웃고 재잘대고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는 불안이 통째로 쏟아진 커피를 마시며 단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다정을 흉내 내는 말투로 한번쯤 묻고도 싶었는데 언제나처럼 입안 가득 설탕만을 털어넣습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미는 당신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제발 다정한 당신의 두 발, 무심코 어느 가녀린 생을 우지끈 스쳐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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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 - 박소란POEM 2014. 10. 31. 00:00
어떤 누구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집 앞 과일트럭이 떨이 사과를 한 소쿠리 퍼주었다어둑해진 골목을 더듬거리며 빠져나가는 트럭의 꽁무니를 오래 바라보았다낡은 코트를 양팔로 안아 드는 세탁소를부은 발등을 들여다보며 아파요? 근심하는 엑스레이를나는 사랑했다 절뚝이며 걷다 무심코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너는 참 처연한 눈매를 가졌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지친 얼굴로 돌아와 말없이 이불을 끌어다 덮는 감기마저 사랑하게 되었음을 내일이 온다면영혼이 떠난 육신처럼 가벼워진 이불을상할 대로 상해 맛을 체념한 반찬을 어루만지기로 한다 실연에 취한 친구는 자주 울곤 했는데사랑은 아픈 거라고 때때로그 아픔의 눈물이 삶의 마른 화분을 적시기도 한다고 가르쳐주었는데어째서 나는 이토록 아프지 않은 건지 견딜 만하다, 덤덤히 말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