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붉은 이마에 긴 천을 감아주던

부드러운 노래의 손길은 사라졌다

따라 부를 수 있지만 먼저 부를 수 없는 소절들이

썩은 앵두 냄새로

가시 울타리 근처에 오래 흔들린다

 

네가 두고 간 남빛 유리병을

희고 부드러운 목으로

바닥에서 주둥이까지 휘감아 오르며

부수는 시간

 

아주 큰 죄를 짓고 싶다

기억이 물의 트럼펫을 마른 귓속으로 불어댄다

 

쉰 곡식 냄새가 풍기는

입술 속에서의 기다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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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 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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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 벽과 지붕과 창문을 잃어버렸다 집보다 큰 상자들이 쌓여 있다

 

집주인:

 

종이배: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너는 알고 있지?

 

바다:

 

왕비: 거울은 썩은 알처럼 내 앞에 있다 그 속에서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빨간 사과는 가을의 홀로그램처럼

 

백설공주:

 

어머니:

 

눈사람: 사랑으로 우리를 녹이는 어머니, 언제나 무無를 낳으시는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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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아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가라앉은 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다

이 아이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감정의 원근법이 맞지 않습니다

 

너와 나의 먼 거리를

아빠가 두 장의 젖은 종이처럼 딱 붙이신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십자가에 꿰뚫린 채 돌아다니는 작은 양들, 진창 속에서

관절이 뒤틀린 채 피어나는 꽃줄기

흰 무릎아, 넌 기어서 어디로 가는 거니

 

진실이 어서 세상으로 나오기를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온 심장처럼

 

얘야, 그런 순간이 오겠지?

아빠가 물으신다

기억의 앙상한 손가락으로 네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때까지

우리는 의심의 회색사과를 나눠 먹을 거야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 싶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이 찢어지는 그런 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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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놓인 누군가의 일기장

펼치면 한 줄도 씌어 있지 않다

무기력의 종이 위에

 

나는 따스한 손바닥으로

펜을 쥐었어, 부화시키려고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의 알들을

 

그거 알아? 나는 생쥐가 파충류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이 별이 내 별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내가 남자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펠릭스를 훔쳤습니다

그거 알아? 계산이 잘못되었다

그거 알아? 너는 텅 빈 목욕탕에 남겨졌다

그거 알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이 찾아왔어

그거 알아? 죽은 친구의 소식을 가져온 우편배달부를 위로했어

그거 알아? 노른자가 깨졌다 식탁 위에서

 

나는 단단하게 살아 있다! 잘 익은 간처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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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나무가 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무거웠지만
허리를 땅속에 묻으니 두 손이 자유로웠다

왜 하필 인적 드문 숲의 나무였을까
골몰하는 사이 한 사내가 찾아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 쓰러져 잠든

그는 기억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시간부터 차례차례 그를 읽는다
갈피마다 사소한 불행이 끼어 있어
단번에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이다

도둑맞은 가방과 비에 젖은 빵
허물어지는 집과 만발하는 아카시아 향기

가슴에 한 사람을 묻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에서는
흙 묻은 구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그는 플랫폼에 서서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호주머니 속의 사랑을 구겨버리고
이름과 질문을 버린다

책은 거기서 멈춰 있다
텅 빈 페이지 밖으로 종달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울다 가지 끝에 내려앉는다

모든 길은 하나의 밤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더 복잡한 책이 오고 있다
이 책은 엄마가 잠시 슬픔에 잠긴 사이
아이가 끓는 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불에 그슬려 빛에 찔려 물에 휘감겨
기어이 비참의 일가를 이루겠다는 듯이


안희연,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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