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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 권의 죽음이 되어간다POEM 2022. 2. 28. 23:03
어느 날 나는 나무가 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무거웠지만
허리를 땅속에 묻으니 두 손이 자유로웠다
왜 하필 인적 드문 숲의 나무였을까
골몰하는 사이 한 사내가 찾아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 쓰러져 잠든
그는 기억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시간부터 차례차례 그를 읽는다
갈피마다 사소한 불행이 끼어 있어
단번에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이다
도둑맞은 가방과 비에 젖은 빵
허물어지는 집과 만발하는 아카시아 향기
가슴에 한 사람을 묻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에서는
흙 묻은 구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그는 플랫폼에 서서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호주머니 속의 사랑을 구겨버리고
이름과 질문을 버린다
책은 거기서 멈춰 있다
텅 빈 페이지 밖으로 종달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울다 가지 끝에 내려앉는다
모든 길은 하나의 밤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더 복잡한 책이 오고 있다
이 책은 엄마가 잠시 슬픔에 잠긴 사이
아이가 끓는 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불에 그슬려 빛에 찔려 물에 휘감겨
기어이 비참의 일가를 이루겠다는 듯이
안희연,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중에서'POEM'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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