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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아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가라앉은 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다
이 아이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감정의 원근법이 맞지 않습니다
너와 나의 먼 거리를
아빠가 두 장의 젖은 종이처럼 딱 붙이신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십자가에 꿰뚫린 채 돌아다니는 작은 양들, 진창 속에서
관절이 뒤틀린 채 피어나는 꽃줄기
흰 무릎아, 넌 기어서 어디로 가는 거니
진실이 어서 세상으로 나오기를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온 심장처럼
얘야, 그런 순간이 오겠지?
아빠가 물으신다
기억의 앙상한 손가락으로 네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때까지
우리는 의심의 회색사과를 나눠 먹을 거야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 싶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이 찢어지는 그런 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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