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참으로 복잡하고 오묘하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생명 현상도 찬찬히 뜯어보면 어떻게 이런 걸작이 생겨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포 내부에서는 갖가지 분자들과 효소들, 세포소기관들이 서로 빈틈없이 협력하여 호흡이나 신호 전달 같은 화학 반응을 매끄럽게 진행한다. 돌고래의 유선형 몸매는 헤엄칠 때 물의 저항을 줄여 준다. 개미 군락은 수많은 식구들 간의 노동 분업을 통해 먹이를 구하고 자식을 공동으로 키운다. 이처럼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하게끔 정교하게 조직화한 생물학적 특성들, 즉 적응adaptation은 너무나 대단하고 훌륭해서 때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들을 공들여 설계했을리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어떤 지적인 설계자가 복잡한 적응을 정말 설꼐해 냈다고 태연히 주장하는 창조주의creationism에 넘어가지는 말길 바란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창조주의는 온 세상의 복잡한 적응을 모두 만들어 낼 만큼 복잡한 설계자 자신은 또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아울러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훨씬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마치 친구에게 무이자로 빌린 빚을 갚고자 살인적인 고리를 자랑하는 사채 대금을 끌어 대는 격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초기 상태에서 복잡하고 정교한 생물학적 적응이 자연적으로 생겨난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복잡한 '설계'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윈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간명하다. 서로 경쟁하는 유전자들 가운데 개체군 내에 가장 잘 전파되는 유전자가 계속 선택되어 마침내 복잡한 적응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중략) 이렇게 유전되는 형질들 가운데 그 종의 생태적 환경에서 먹이를 잘 찾거나, 포식자를 잘 피하거나, 전염병에 잘 안 걸리게 하는 등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형질이 점차 개체군 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오래된 연장통』, 2010, 전중환, 사이언스

그리곤 여학생의 흡연이 여태도 논란된다는 사실이 하도 놀라워서 이 글을 쓴다고 전제했다. 우리 대학의 남학생들은 아직도 나혜석을 매도하는 시대에서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했음을 슬퍼한다고도 썼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p.44
사람의 몸이나 마음마저 화학 물질과 화학 반응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아무런 신비함이 없다거나 화학만 알면 나머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화학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수록, 세상은 더 신비하고 더 흥미진진해진다.

p.205
같은 운향과 식물이지만 긴 세월동안 어떻게 진화하느냐에 따라 어떤 것은 맵고 아린 맛으로 인기를 끄는 산초와 초피가 되었고, 어떤 것은 새콤달콤한 귤이 되어, 마라탕 국물과 감귤 주스만큼이나 다른 결과에 도달했다.

p.288
1959년 6월 2일에는 “나니야”라는 별명의 선장이 이끌던, 20대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여성 해적단이 체포된 사건도 있었다.



- 『곽재식의 도시 탐구』 , 곽재식

나는 그 엄청난 구매력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신용카드라는 걸, 업자의 입장에서 고맙게 생각했다. 만일 현금으로 그 많은 물건 값을 받는다면 은행까지 운반하려고 해도 돈을 가마니에다 넣고 꾹꾹 발로 눌러 담아 트럭에 실어야 할 것 같았다.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집 없는 아이」 , 박완서, p.47

어린 거북손은 새우나 곤충 비슷한 모습으로 바다를 헤엄치면서 움직이는 생물이다. 그때는 확실히 갑각류나 곤충처럼 생겨서 절지동물답다. 그 모습으로 바다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잡아먹고 자신을 먹으려는 적을 피하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거북손은 변신한다. 이 과정에서 팔, 다리를 모두 없애 버린다. 모르기는 해도 그렇게 움직이는 부위를 없애 버리면서 세상을 탐험하며 돌아다니는 데 필요한 신경 계통과 뇌도 모두 다 녹여 없앨 것이다. 인생 사는 데 피곤할 뿐이라고 판단하면 스스로 정신과 의식을 없애 버리는 생물이라고 짐작해 봐도 좋을까 모르겠다.
변신을 완료한 거북손은 바다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시절은 잊고, 가장 괜찮은 한자리에 눌러앉아 그냥 가만히 머무르며 남은 평생을 보낸다. 그것이 다 자라난 모습이다. 움직이지도 않고, 돌아다닐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남해안의 그 많은 거북손은 모두 그렇게 가만히 앉아 남은 평생을 보내면서 드디어 완전한 안식을 얻었다고 느끼는 것일까? 혹시 그렇게 긴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보내는 거북손 중에, 먼바다를 구경하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하나쯤 있지는 않을까?

- 『곽재식의 도시 탐구』 , 「여수, 청동 검사의 도시에서 세계적인 화학 도시로」 , 곽재식, p.266

2. 사랑과 저항은 하나
 
사람들이 시인 진은영을 어떻게 떠올리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의 시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하자.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로 시작되는 「첫사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로 시작되는 「연애의 법칙」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너는 참 좋을 텐데"로 시작되는 「시인의 사랑」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등을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그런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사랑'을 제목에까지 올렸다. 네번째 시집을 그야말로 '사랑의 서(書)'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듯 말이다. 시집 제목을 품고 있는 첫 시 「청혼」을 그는 2014년 가을에 발표했고, 문예지에 발표되고 시집으로 출간되지 않은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이게도 지난 8년 동안 웹에서 널리 건네지며 읽혔다. 그 시가 이제야 시집에 묶인다. 이 짧은 시 안에는 얼마나 긴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청혼」 전문

 
다섯 개의 연이 A-X-Y-A'-Z의 구조를 이룬다. A와 A'가 일종의 후렴이라면, X와 Y는 짝을 이루며 마주 보는 본론이고, Z는 마무리다. 후렴부터 볼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애매하다. "오래된 거리처럼"이 '너'의 속성인지('오래된 거리 같은 너를 사랑해'),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의 속성인지('너를 오래된 거리를 사랑하는 듯 사랑해')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문맥상 후자일 듯하다. 유년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만큼 오래된 관계인 두 사람이라는 것일까. 그렇게 시간의 깊이를 소중히 여기는 이의 청혼이 더 아름답다는 것일까. 이럴 때의 청혼은  결혼으로 가기 위한 단계적 의례라기보다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불가결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이벤트에 가까울 것이다. 그 청혼을 위한 어느 날, 긴 시간의 깊이가 무색하게도, 화자는 조금 흥분해 있다. A에서는 별들이 벌들처럼 웅성거리고(시각의 청각화), A'에서는 반대로 벌들이 별들처럼 웅성거린다(청각의 시각화).* 눈이 시끄럽고 귀가 눈부시다는 걸까. 어서 청혼하라고, 온 세상이 독촉이라도 하는 듯이.
"오래된 거리처럼"이기 때문에, X와 Y에 담겨 있는 고백은 시간의 깊이를 아우른다. 두 사람의 현재가, 과거로는 깊은 뿌리를 뻗었고 미래로는 긴 가지를 드리웠다는 것이다. X는 미래에 대해 말한다. 여름이 오면 비를 주겠다는 말은 당신의 미래에 필요한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래에 아첨하지 않겠다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말 그대로 미래의 환심을 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이니까, 둘의 미래가 장밋빛일 수만은 없을 가능성을 감수하겠다는 각오일 것이다. Y는 과거에 대해 말한다. 어린 시절의 맹세를 떠올리고 그 소박하고 순수했던 다짐들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의 모범 시민으로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지는 않겠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화자에게는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 즉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던 모양인데, 그만큼 당신은 나를 기다려야 했고 청혼도 이렇게 늦춰졌으리라. 애초 너를 위해 서야 했으나 방황 때문에 그러지 못한 시간이기에 '돌려준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 구절에는 약간의 회한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처럼 현재의 사랑은 과거를 보상하고/보상받고 싶게 한다.
미래를 함께 준비하면서 그 앞에 당당해지겠다는 결심,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살려 둘 과거를 구원하자는 제안, 바로 그런 것이 청혼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혼이란, 하고 말하듯 시인은 Z를 남겨두었다. 청혼, 그러니까 한 사람 곁에 머물겠다고 결심하는 일의 가장 소중하고 어려운 핵심은 무엇인가.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마시는 것. 이 쓴잔의 비유는 물론 성경에서 가져온 것이니까,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그 일을 했다면 나는 단 한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쓴잔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보라. 그것은 슬픔이다. 너의 슬픔, "투명 유리 조각" 같은 슬픔. 마시면 내 속이 다 긁히게 될 그것을, 너를 위해 마시는 일. 그러고 나면 '너'의 슬픔은 '우리'의 슬픔이 될 것이고, 그것은 아주 결정적인 일이 된다. 왜냐하면 슬픈 사람은 그 슬픔 때문에 외로워진 사람이기도 한데('내 슬픔을 누가 알까?'), 슬픔을 나눠 마시는 일은 슬픔 자체를 없애지는 못할지언정 너의 외로움은 박탈하게 될 것이므로.
어쩐지 이 시의 청혼이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시인이 1부의 입구에 얹은 제사(題詞)가 존 버거John Berger의 소설 『A가 X에게』의 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저항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남자 사비에르('X')가 있고, 그의 연인이자 자신 또한 감옥 밖에서 대의를 위해 투쟁 중인 여자 아이다('A')가 있다. 둘은 법적 관계가 아니어서 면회가 어렵다. 어느 날의 편지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제안한다. "방금 한 가지 결정을 내렸어요. 우리 결혼하는 게 어때요? 당신이 청혼하고, 내가 '네'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소설에서 이 결혼은 허락받지 못하지만, 청혼의 상상만으로도 이들은 조금 더 살아낼 힘을 얻었으리라. 진은영의 「청혼」이 어쩌면 아이다의 제안을 받은 사비에르가 그 편지지의 뒷면에 '시로 쓴 청혼'일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해보는 일은 시인이나 소설가 둘 중 하나에 대한 결례가 아니라 두 작품 모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도둑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린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부분

 
이쯤에서 생각해보면 「청혼」의 핵심이 과거/미래에 대한 약속과 다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소설 속 아이다가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장면과 어울리는데,*** 물론 이는 사랑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그러니까 연인들의 현재가 자주 (그들이 함께하지 못한 시간대인)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가 그 시간대조차 물들이려 하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유사성일 것이다.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라는 제목의 저 시에서도 "당신의 고향"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이다. 이 시의 울림은 당신 고향집 풍경의 디테일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쩐지 화자는 '당신'의 고향집에 당신 없이 와 있는 것만 같고, 그가 당신의 유년 시절을 마치 손으로 어루만지듯 차근차근 짚어나가는 것은 지금 내가 당신을 만질 수 없어서인 것 같고, 이 고향에는 슬픈 역사가 있어 그것이 오늘날 당신의 강인함을 만든 것만 같고, 잠든 당신의 등에 민달팽이를 풀어놓겠다는 약속 역시 당장은 실천할 수 없는 간절한 상상인 것만 같아서다. 마치 사비에르의 고향에 와 있는 아이다처럼, 이라고 적어도 좋다면 그러고 싶다. 단 세상의 모든 사비에르와 아이다를 동시에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그 모든 '사랑의 전문가'들을 위한 시가 있다.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 「사랑의 전문가」 전문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랑받는 대상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사랑을 믿는 너의 행동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복기하는 시다. 요컨대 '마법'과 '변신'의 이야기. 모든 문장이 인과관계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처음에 나는 돌멩이였는데 네가 건드리자 싹이 돋아나서 식물이 되었고, 네가 그 식물을 부러뜨리자 피가 흐르는 동물이 되었으며, 그 피가 바다를 이룰 정도가 되어 네가 발가락을 담그자 바다는 기름이 되어 타오를 준비를 하는데,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다 그쳤으므로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가 왜 과거형으로 쓰였겠는가), 그 기름은 불로 타오르지 못하고 폐유가 되어 바다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바다로부터 한 번 생겨난 기름은 다시 바다로 섞이지 못하는데, 그게 당연한 것처럼, 내 사랑의 슬픔도 망각 속으로 섞여 사라지지는 않더라고 이 시는 말한다. 결말이 이렇다고 해서 이 시를 비가로 읽거나 제목을 냉소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사랑의 전문가'들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더 곱씹어야 할 적어도 하나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사랑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다.
 
 
 
* 이 별과 벌의 이미지는 바로 앞에서 인용한 「그러니까 시는」의 8연에도 있다. 이 이미지의 뿌리는 시인의 (무)의식 어디에 닿아 있을까.
** 존 버거, 『A가 X에게』, 김현우 옮김, 열화당, 2009.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부탁해 봐요. 그들이 허락하면, 내가 당신을 찾아가 결혼식을 올리고, 그럼 앞으로 영원히, 매주 한 번씩 면회실에서 만날 수 있어요!/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봅니다―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당신의 아이다"(p.27).
*** 아이다는 사비에르에게 "당신이 원한다면, [과거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우리가 과거의 죄수들은 아니니까. [……] 우리 함께 과거를 만들어봐요." (p.33)라고, 또 "우리는 이미 시작된 어떤 미래 안에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딴 미래 안에 있는 거예요." (p.48)라고 하면서, 현재의 두 사람과 달리 과거와 미래 속의 두 사람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힘껏 상상하자고 말한다.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신형철 평론가가 쓴 해설 「사랑과 하나인 것들: 저항, 치유, 예술」 중에서.

 
 
 


2014년 창작과비평에서 접한 후 늘 마음에 담겨있던 시.
 

진은영, 작가의 말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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