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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피아노 - 김선재POEM 2021. 1. 31. 02:26
검은 눈보라를 쥘 때는 모래의 발소리를 기억해
낮고 좁아 희미한 계단이 잘 보이도록
걷다 보면 점점 더 북쪽으로
갈수록 뒤돌아보는 일이 줄었다
나무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 호수도 말이 줄었다
엷어지는 이 시간은 회색과 암청색의 건반 사이
음계 없는 피아노는 밤새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 내 발치에서 울다 가는 꿈
지금은 흐린 색들이 서로의 옷소매를 꿰매는 시간
어제는 얼음을 쓰다듬다가 얼음의 결정에 눈을 찔렀지
내일은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공 안의 공동(空洞)이
공동 안의 적막이 나를 쓰다듬어준다면
낡은 양탄자의 보푸라기처럼 떠는 날들과
혼자인 구름과 함께 혼자가 되는 구름의 날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누군가 내 머리맡에 써놓고 간 낙서
꼭 다시 만나요
침묵의 영토 끝에서
나는 나를 여기서 저기까지 옮겨놓는다
흰 말과 검은 음 사이 반듯한 결정들의 결정을 지나
얼굴에서 얼굴을 지우며
손끝에서 마음을 지우며
모퉁이에서 모서리를 지우며 점점 더 북쪽으로
처음의 영토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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