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당신의 일기를 베끼고 바다로 와서 지운다.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 당신은 말해진 적 없는 말. 모든 걸 씻고. 이렇게 당신이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 게, 눈물을. 바다의 푸른 계단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절벽에서 하얀 고통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다. 거품들이 분말처럼 흩어지면 당신이 흘려둔 해식애로 세워지던 안개 도시. 파도는 내 몸에 맞다. 나쁜 말들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내 얼굴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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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별거겠니

추억하며 잊어 가는 일

죽고 싶다가 살고 싶은 일

감정의 시소 타며 하늘 보는 일

사는데 가장 큰 고통은 욕망이야



나를 안아 줘

안전벨트처럼 안아 줘

불안한 술잔처럼 기울지 않게

돈 걱정과 죽음에 짓눌리지 않게

나를 잡아, 나를 놔


자, 우린 일하고 깨치며 가야지

네 입과 내 입에 사랑의 떡을 처넣고

입 깊숙이 슬픔 들끓게 내버려 두고

쌀과 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오늘은 다르게 살기 위한 시도잖니


이 도시만큼 괜찮은 무덤도 없을 거야

너만큼 편안한 수갑도 없을거야

네 안에 있으니 따뜻해졌어

날 조이지마 나한테 매달리지 마

그렇다고 날 떠나면 되겠니

나를 잡아, 나를 놔

나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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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언젠가의 그 시간을 되돌아 볼때

내가 그에게 후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아픔이거나 슬픔이거나 갈증이거나,

그러한 아름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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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잊자마자 당신을 이해했어.

닫혀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은 문 앞에서.

뜨거워져서 점점 더 뜨거워져서

드디어 얼어붙을 것 같았는데. 이봐,

노력하면 조금씩 불가능해진다.

바쁘고 외로운 식탁에서 우리는

만났으므로 헤어진 연인들처럼.

당신을 알지 못해서 당신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을 했구나.

어려운 책을 읽기 때문에 점점

단순한 식물이 되어서.

해맑아서

잔인한 아이처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새벽마다 또 눈을 뜨네.

내가 조용한 가구를 닮아갈 때

그건 방 안이 아니라 모든 곳,

거기서

당신이 나타났다.

밤이라서 너무 환한 거리에서.

바로 그 눈 코 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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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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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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