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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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피아노 - 김선재POEM 2021. 1. 31. 02:26
검은 눈보라를 쥘 때는 모래의 발소리를 기억해 낮고 좁아 희미한 계단이 잘 보이도록 걷다 보면 점점 더 북쪽으로 갈수록 뒤돌아보는 일이 줄었다 나무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 호수도 말이 줄었다 엷어지는 이 시간은 회색과 암청색의 건반 사이 음계 없는 피아노는 밤새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 내 발치에서 울다 가는 꿈 지금은 흐린 색들이 서로의 옷소매를 꿰매는 시간 어제는 얼음을 쓰다듬다가 얼음의 결정에 눈을 찔렀지 내일은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공 안의 공동(空洞)이 공동 안의 적막이 나를 쓰다듬어준다면 낡은 양탄자의 보푸라기처럼 떠는 날들과 혼자인 구름과 함께 혼자가 되는 구름의 날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누군가 내 머리맡에 써놓고 간 낙서 꼭 다시 만나요 침묵의 영토 끝에서 나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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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왕 - 이현호POEM 2020. 4. 28. 10:14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을 들어봤다면 그렇게 말한 건 자기 배로 날 낳은 한 암컷이었지 내 하나뿐인 언청이 친구만 평생 욕하다 내장까지 썩어버린 그년이야말로 태어나서 가장 잘못 사귄 사람 발 달린 것들 모두 한 마리 미친개를 피해 다닌 사건들의 시간 달아나기 전에 저게 왜 미쳤는지 왜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날카로운 것들이 정점을 가진 것들이 눈부셔 세상이 끝날 것처럼 끝난 것처럼 나는 길거리를 날뛰었고 그런 날만큼은 우연의 자식이 아니었지 그러다 이야기가 되려니 개 같은 사랑이 ...... 불안을 먹이고 불안은 사랑을 먹이며 다음엔 안개로 태어나고 싶다는 널 보는 동안만 지상의 삶에서 손뗄 수 있었지 너 없이도 세상이 계속된다고 믿는 것들에겐 함부로 칼을 꽂았고 다음엔 불빛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술집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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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일이 지나고 오늘 - 이성미POEM 2020. 4. 28. 00:00
한 사람이 가자 이어달리기하듯 다른 사람이 왔다. 그는 가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나는 파란 바통이 되어 …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은 일곱 개의 태양이 뜬 날. 오늘은 일곱 나라의 언어로 종알거린다. 나는 오늘의 입을 보고 있다. 오늘은 주름치마를 입고 사장 좌판을 펼치듯 하루를 펼친다. 오늘은 뜨거운 시간, 서늘한 시간, 밝은 시간… 각자 다른 길이와 온도를 가진다. 나는 시계 소리를 듣고 있다. 밤이 가까워질수록 오늘은 점점 느리게 간다. 오늘은 뒤섞이고, 오늘은 돌기가 있고, 마주 보다가 몸이 멍청해진다. 오늘 새벽의 공기는 하얀 스카프처럼 휘감으며 속삭였지. 나를 사랑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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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시간 - 심보선POEM 2020. 3. 31. 00:00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