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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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영혼 2 - 이현승POEM 2020. 3. 30. 01:02
나는 당신의 꿈을 엿보는 자 당신의 잠꼬대를 기록하는 자 당신은 허공 가득 두 손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당신의 잠은 봉인이 아니라 누수의 방식으로 완성된다 구멍을 막기에 당신은 너무 작은 손을 가진 사람 바늘을 집어올려야 하지만 당신은 너무 큰 손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너무 커서 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덩어리진 소리들 당신의 꿈을 받아 적는 일은 언제나 불완전하기만 하다 설탕유리 같은 꿈이 당신을 피 흘리게 하지는 않지만 당신은 계속 솟구치는 피를 막거나 훔쳐댄다 나는 가벼운 읽을거리나 마실 물을 준비한다 당신은 단것을 조금 먹은 사람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당신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지만 당신은 결국 당신에게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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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 박소란POEM 2020. 3. 28. 09:34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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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달아난다 - 이규리POEM 2020. 3. 24. 23:12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득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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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 박소란POEM 2020. 3. 22. 20:26
커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어쩌면 테이블 아래 새하얀 설탕을 입에 문 개미들이 총총총 기쁨에 찬 얼굴로 지나갑니다 개미는 다정한 친구입니까 애인입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달콤한 입술로 내가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당신을 위해 오늘도 나는 단것을 주문하고 마치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웃고 재잘대고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는 불안이 통째로 쏟아진 커피를 마시며 단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다정을 흉내 내는 말투로 한번쯤 묻고도 싶었는데 언제나처럼 입안 가득 설탕만을 털어넣습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미는 당신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제발 다정한 당신의 두 발, 무심코 어느 가녀린 생을 우지끈 스쳐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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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 - 이병률POEM 2019. 6. 27. 00:03
나 무엇이든 잘 기록할 수 있는 사람 되어 당신 모르는 잠버릇을 기록할 수 있다면 문신을 그리겠다는 당신 살갗을 내 시간으로 쓰다듬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닳은 뼈와 기억이 되어 폭설로 잠들 수 없는 밤에 당신 역사와 내통할 수 있다면 어느 신성한 연기 되어 당신 온몸을 방부할 수 있다면 한 줄 위에 나란히 이불로 널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의 광채를 다 가질 수만 있다면 어느 생에서 한 번 당신에게 부딪혔던 작은 새의 파닥거리는 심장이 되어 당신 손아귀에서 안식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리하여, 그럼에도 따위의 말들을 앞세운 추신들이 모두 당신에게 귀결될 수 있다면 그러고도 이 편지의 맨 끝에 꾹꾹 눌러 쓰나니 부디 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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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산의 바람 - 이제니POEM 2018. 8. 21. 00:00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꿈에 나타나 웃었다 울었다 사라졌다. 바람 사이로 사라지는 사람. 사람 뒤로 사라지는 바람. 비산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쪽은 울고 한쪽은 웃는다. 울면서 웃는 것. 웃으면서 우는 것.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 여럿이서 하나가 되는 것보다 하나인 채 여럿인 방식을 택한 이후로. 그 골짜기에서 너는 돌이 되었구나. 바람이 되었구나. 내내 고독해졌구나. 아코디언과 폴카. 룰렛과 도미노. 광장으로 모여드는 겁 없는 청춘들처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이미 있었던 사물의 의연함으로. 아름다움 속에서. 아름다움 속에서. 너는 높낮이가 다른 물그릇을 두드린다. 들리지 않는 마음처럼 어떤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종이 위에 적힌 어두움이여. 찾아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