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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음을 주세요 - 박연준
    POEM 2017. 12. 30. 20:39

    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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