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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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피아노 - 김선재POEM 2021. 1. 31. 02:26
검은 눈보라를 쥘 때는 모래의 발소리를 기억해 낮고 좁아 희미한 계단이 잘 보이도록 걷다 보면 점점 더 북쪽으로 갈수록 뒤돌아보는 일이 줄었다 나무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 호수도 말이 줄었다 엷어지는 이 시간은 회색과 암청색의 건반 사이 음계 없는 피아노는 밤새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 내 발치에서 울다 가는 꿈 지금은 흐린 색들이 서로의 옷소매를 꿰매는 시간 어제는 얼음을 쓰다듬다가 얼음의 결정에 눈을 찔렀지 내일은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공 안의 공동(空洞)이 공동 안의 적막이 나를 쓰다듬어준다면 낡은 양탄자의 보푸라기처럼 떠는 날들과 혼자인 구름과 함께 혼자가 되는 구름의 날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누군가 내 머리맡에 써놓고 간 낙서 꼭 다시 만나요 침묵의 영토 끝에서 나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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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이이체POEM 2018. 8. 17. 00:00
몸에 당신의 일기를 베끼고 바다로 와서 지운다.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 당신은 말해진 적 없는 말. 모든 걸 씻고. 이렇게 당신이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 게, 눈물을. 바다의 푸른 계단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절벽에서 하얀 고통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다. 거품들이 분말처럼 흩어지면 당신이 흘려둔 해식애로 세워지던 안개 도시. 파도는 내 몸에 맞다. 나쁜 말들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내 얼굴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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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역설 - 이장욱POEM 2018. 7. 6. 01:42
당신을 잊자마자 당신을 이해했어.닫혀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은 문 앞에서.뜨거워져서 점점 더 뜨거워져서드디어 얼어붙을 것 같았는데. 이봐,노력하면 조금씩 불가능해진다.바쁘고 외로운 식탁에서 우리는만났으므로 헤어진 연인들처럼.당신을 알지 못해서 당신에 대해그토록 많은 말을 했구나.어려운 책을 읽기 때문에 점점단순한 식물이 되어서.해맑아서잔인한 아이처럼.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새벽마다 또 눈을 뜨네.내가 조용한 가구를 닮아갈 때그건 방 안이 아니라 모든 곳,거기서당신이 나타났다.밤이라서 너무 환한 거리에서.바로 그 눈 코 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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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선언문 - 김이듬POEM 2016. 9. 16. 01:44
'사랑스러워'를 '사랑해'로 고쳐 말하라고 소리 질렀다밥 먹다가 그는 떠났다사랑스러운 거나 사랑하는 거나남자는 남자다워야 하나 죽은 친구를 묻기도 전에민첩하게 그 슬픔과 분노를 시로 쓰던 친구의 친구를 본 적 있다그 정신에 립스틱을 바르고난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렇게 시인은 시인다워야 하나 오늘 나는 문학적인 선언문을 고민한다내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써서 카페에 올렸다주저 말고 서둘러야 한다. 적이 문제다 '─적的'은 '-다운,-스러운'의 의미를 가진 접사인데'문학적文學的'이라는 말문학적 죽음, 문학적 행동, 문학적 선언, 시적 인식, 시적 소설나는 지금 시적으로 시를 쓸 수 없구나 문학적인 선언문을 쓰자는 말은왕에게 속한 신성한 것을 그냥 불러서는 안 되는폴리네시아 인처럼 은유로 도피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