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
아빠 - 진은영POEM 2023. 4. 4. 12:41
얘야 아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가라앉은 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다 이 아이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감정의 원근법이 맞지 않습니다 너와 나의 먼 거리를 아빠가 두 장의 젖은 종이처럼 딱 붙이신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십자가에 꿰뚫린 채 돌아다니는 작은 양들, 진창 속에서 관절이 뒤틀린 채 피어나는 꽃줄기 흰 무릎아, 넌 기어서 어디로 가는 거니 진실이 어서 세상으로 나오기를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온 심장처럼 얘야, 그런 순간이 오겠지? 아빠가 물으신다 기억의 앙상한 손가락으로 네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때까지 우리는 의심의 회색사과를 나눠 먹을 거야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 싶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
-
나는 도망 중 - 진은영POEM 2023. 4. 4. 11:06
머릿속에 놓인 누군가의 일기장 펼치면 한 줄도 씌어 있지 않다 무기력의 종이 위에 나는 따스한 손바닥으로 펜을 쥐었어, 부화시키려고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의 알들을 그거 알아? 나는 생쥐가 파충류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이 별이 내 별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내가 남자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펠릭스를 훔쳤습니다 그거 알아? 계산이 잘못되었다 그거 알아? 너는 텅 빈 목욕탕에 남겨졌다 그거 알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이 찾아왔어 그거 알아? 죽은 친구의 소식을 가져온 우편배달부를 위로했어 그거 알아? 노른자가 깨졌다 식탁 위에서 나는 단단하게 살아 있다! 잘 익은 간처럼 중에서
-
독서의 시간 - 심보선POEM 2020. 3. 31. 00:00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