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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 진은영POEM 2023. 4. 4. 12:41
얘야 아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가라앉은 배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다 이 아이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다 감정의 원근법이 맞지 않습니다 너와 나의 먼 거리를 아빠가 두 장의 젖은 종이처럼 딱 붙이신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십자가에 꿰뚫린 채 돌아다니는 작은 양들, 진창 속에서 관절이 뒤틀린 채 피어나는 꽃줄기 흰 무릎아, 넌 기어서 어디로 가는 거니 진실이 어서 세상으로 나오기를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온 심장처럼 얘야, 그런 순간이 오겠지? 아빠가 물으신다 기억의 앙상한 손가락으로 네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때까지 우리는 의심의 회색사과를 나눠 먹을 거야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 싶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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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저항은 하나 (진은영, 청혼에 대한 해설)WORDS 2023. 4. 4. 12:29
2. 사랑과 저항은 하나 사람들이 시인 진은영을 어떻게 떠올리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의 시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하자.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로 시작되는 「첫사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로 시작되는 「연애의 법칙」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너는 참 좋을 텐데"로 시작되는 「시인의 사랑」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등을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그런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사랑'을 제목에까지 올렸다. 네번째 시집을 그야말로 '사랑의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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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망 중 - 진은영POEM 2023. 4. 4. 11:06
머릿속에 놓인 누군가의 일기장 펼치면 한 줄도 씌어 있지 않다 무기력의 종이 위에 나는 따스한 손바닥으로 펜을 쥐었어, 부화시키려고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의 알들을 그거 알아? 나는 생쥐가 파충류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이 별이 내 별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내가 남자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펠릭스를 훔쳤습니다 그거 알아? 계산이 잘못되었다 그거 알아? 너는 텅 빈 목욕탕에 남겨졌다 그거 알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이 찾아왔어 그거 알아? 죽은 친구의 소식을 가져온 우편배달부를 위로했어 그거 알아? 노른자가 깨졌다 식탁 위에서 나는 단단하게 살아 있다! 잘 익은 간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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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발명된 지 5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WORDS 2023. 4. 4. 11:02
읽기는 반드시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학습 기술이다. 문자가 발명된 지 5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DNA에는 읽기와 관련된 유전자 코드가 없다. 사람의 대뇌피질에 언어 이해 영역과 언어 표현 영역은 있지만 읽기 영역은 없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읽기 능력이 습득되면 뇌의 후측두엽에 읽기와 관련된 단어의 철자, 발음, 뜻이 저장되었다가 자동으로 분석하는 단어 형성 영역이라는 곳이 새로 생기면서 읽기가 자동화된다. -《배움이 느린 아이들》중에서, 김영훈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