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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 권의 죽음이 되어간다POEM 2022. 2. 28. 23:03
어느 날 나는 나무가 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무거웠지만 허리를 땅속에 묻으니 두 손이 자유로웠다 왜 하필 인적 드문 숲의 나무였을까 골몰하는 사이 한 사내가 찾아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 쓰러져 잠든 그는 기억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시간부터 차례차례 그를 읽는다 갈피마다 사소한 불행이 끼어 있어 단번에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이다 도둑맞은 가방과 비에 젖은 빵 허물어지는 집과 만발하는 아카시아 향기 가슴에 한 사람을 묻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에서는 흙 묻은 구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그는 플랫폼에 서서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호주머니 속의 사랑을 구겨버리고 이름과 질문을 버린다 책은 거기서 멈춰 있다 텅 빈 페이지 밖으로 종달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고 소리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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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피아노 - 김선재POEM 2021. 1. 31. 02:26
검은 눈보라를 쥘 때는 모래의 발소리를 기억해 낮고 좁아 희미한 계단이 잘 보이도록 걷다 보면 점점 더 북쪽으로 갈수록 뒤돌아보는 일이 줄었다 나무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 호수도 말이 줄었다 엷어지는 이 시간은 회색과 암청색의 건반 사이 음계 없는 피아노는 밤새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 내 발치에서 울다 가는 꿈 지금은 흐린 색들이 서로의 옷소매를 꿰매는 시간 어제는 얼음을 쓰다듬다가 얼음의 결정에 눈을 찔렀지 내일은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동공 안의 공동(空洞)이 공동 안의 적막이 나를 쓰다듬어준다면 낡은 양탄자의 보푸라기처럼 떠는 날들과 혼자인 구름과 함께 혼자가 되는 구름의 날들 —꼭, 다시 만나자 사라지도록 누군가 내 머리맡에 써놓고 간 낙서 꼭 다시 만나요 침묵의 영토 끝에서 나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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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왕 - 이현호POEM 2020. 4. 28. 10:14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을 들어봤다면 그렇게 말한 건 자기 배로 날 낳은 한 암컷이었지 내 하나뿐인 언청이 친구만 평생 욕하다 내장까지 썩어버린 그년이야말로 태어나서 가장 잘못 사귄 사람 발 달린 것들 모두 한 마리 미친개를 피해 다닌 사건들의 시간 달아나기 전에 저게 왜 미쳤는지 왜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날카로운 것들이 정점을 가진 것들이 눈부셔 세상이 끝날 것처럼 끝난 것처럼 나는 길거리를 날뛰었고 그런 날만큼은 우연의 자식이 아니었지 그러다 이야기가 되려니 개 같은 사랑이 ...... 불안을 먹이고 불안은 사랑을 먹이며 다음엔 안개로 태어나고 싶다는 널 보는 동안만 지상의 삶에서 손뗄 수 있었지 너 없이도 세상이 계속된다고 믿는 것들에겐 함부로 칼을 꽂았고 다음엔 불빛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술집 창..